마을에서 두 번째로 연세가 많으신 86세의 김학임 할머니 댁은 무거마을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이 예전에는 ‘노현리’라는 마을이름으로 무거마을과는 별개의 마을로 6~7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할머니 집은 마당을 품고 있는 옛 가옥의 형태를 띠고 있어 포근하고, 방안으로 들어서면 반질한 나무기둥이며 창호지문이며 물건들이 할머니의 정성스런 손길이 닿아 더욱 옛스럽다.

이 집에는 할머니께서 혼자 사신다.
마을 운영위원장님과 할머니 집을 방문한 때는 초가을 밤이었다.

시냇물을 따라, 밭길을 따라, 마당을 건너 할머니의 방에 앉았다.
예전엔 마루였을 것 같은 앉은 자리는 넓은 유리문으로 마당과 마주하여 풀벌레 소리가 듣기 좋았고,
벽으로 뚫린 작은 광들은 무수한 이야기들의 숨은 밀실과 같았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캄캄한 밤 풀벌레의 소리를 따라 길고 길게 이어졌다.

우리 어머니 고향은 전주여, 월평에서 날 낳고 이곳에 와서 주저앉았어.
난 시집오기 전에 아랫마을 큰 동네에서 살다가 이쪽 동네로 시집을 왔어.
옛날에는 이 동네와 저 동네가 떨어진 동네라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시집을 왔어.
남편 얼굴을 첫날밤에 본거야.

시집을 왔는데, 시어머니와 시아버지가 출입이 넓고 술을 잘 묵어, 대접하려니 힘이 들었어.
두 분 다 날 미워해, 시할머니까지 있었는데 그도 미워해.
친정에선 미움 받고 살지 않았지만 시집오니 전혀 달라.

더군다나 시집 간 지 3년이 지났는데도 아이가 안 나오니 시어머니는 나보고 헛밥 쳐 묵는다”고 하는데, 헛밥이 먼지 나중에야 알았어, 기가 찰 노릇이지.
3년이 지나서 23살에 아이를 낳았는데 딸을 낳았어, 또 낳으니 딸, 또 낳으니 딸, 쪼르르르 딸만 넷을 낳았어.
그러다보니 날 보는 인심이 심해져, 그땐 시집가서 못살면 사람 취급도 안했어.

더 힘들게 된 것이 머냐믄,
우리 친정어머니하고 시어머니가 내가 결혼하자마자 싸워,
틀어져서 4년간 말도 안하고 살았어. 시어머니도 술꾼 친정어머니도 술꾼이여, 서로 등을 지고 사니, 이편을 잘한다 혀~ 저편을 잘한다 햐~,
나 사는 것이 추접혀서 어디에다가 말도 못해.
엄마 찾아가서 못산다는 말은 못하고 좀 풀고 살라고 했어
“술 먹으면 사과도 잘한다는데 왜 사과도 못하냐”고
친정 어머니 오장을 뜯었어, 시어머니한텐 말도 못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못살겠어, 그래서 ‘죽어야겠다’ 생각하고 물에 빠져 죽을려고 낮에 물을 보고 집에 왔어. 수 놓으려 사놓은 실을 정리 해 놓고 캄캄한 저녁에 그 물길로 가는데 무서워서 못가겄어,
그래서 돌아와 자고 있는 딸래들 이불을 잘 덮어놓고 생각을 했어,
‘어떻하든 이집에서 살아야하는데 온 식구가 다 미워하니 어찌 살어,
남편만 날 미워하면 그냥 가겠는데 이러니저러니 생전 말도 않고..
아이고 어떡하면 좋아..’


그렇게 십년을 살다가 아들을 낳았어, 어른들은 이제 아들이 줄줄이 낳을 줄 알았지.
그런데 또 낳으니 딸 또 낳으니 딸, 1남 6녀가 된 거지.
그런 속에서 내가 살았어, 생각만하면 아득햐,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몰러,

그래도저래도 남편이란 사람은 말 한마디가 없어, 나보고 잘하네 못하네 말 한마디를 못해. 항상 시어머니한테 “이 사람한테 몹쓰게 하지 말라”고 하고. 밥이나 먹고 할 일이나 하러 가고. 그나마 그 정도하니 그 바람에 내가 산 거지
시방도 가만 생각하면 ‘남편이 내게 머라 소리 안 했으니 이집 귀신으로 산다’ 생각이 들어. 아무튼,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이 집에서 어떻게 살고’하고 생각하다가 신랑이 일하러 가면 무조건 신랑을 쫒아다녔어, 나무하러 가면 쫒아가고, 풀하러 가면 쫒아 가고.

처음엔 농사를 어떻게 짓는지도 몰랐는데 농사도 짓고, 개도 키우고 멧돼지도 키우고 염생이도 키우고, 처음엔- 새끼치고 팔고 하면 돈도 뭉텅뭉텅 되고 좋았지. 그런데 소를 죽자살자 키우고 나니 소파동이 났어,
잘 먹고 살지도 못하고 그럭저럭 사는데 빚이 져서 한바탕 허우적거렸어.
조합에 빚을 졌는데 그땐 조합 사람들이 25일이면 돌아다니면서 걷었어.
그들이 저 개울을 건너오면 나는 숨어 있었어. 그땐 삼농사를 지어서 다 조합에 갖다 주었어. 한 해는 삼을 놨는데 다 썩어 버렸어. “썩었으니 다 베어 버리자”하니 영감이 “썩은 똥자루라도 섰어야 조합에서 빚을 준다.”며 못 뜯게 혀.
그때에는 빚 갚느라, 농사를 지어도 시집간 딸들에게 쌀 한 되를 못 보내주었어.

어려운 시절에 자식들 한도 많았겠지. 1남 6녀의 자식들을 제대로 못 가르쳤어.
아이가 대학에 들어갔는데, 1년 보내고 2년차에는 돈이 없어 등록금을 안 대주니 말아버리데.
그리고 집에도 안와, “너 왜 안 오냐” 하니
“하고 싶은 공부도 못 하게 하고 일만 시키려 하고 돈만 벌게 혀. 엄마 아빠도 뵈기 싫어”하고 1년이나 안 와...

영감이 돌아가신 지가 10년이 지났는데, 돌아가신 그때까지 빚을 못 갚았어.
그 양반 출상을 마치고 딸이 이러는 거야.
“엄마 조합원 빚 다 갚았으닌개롱, 맘 편히 살어.” 딸이 그렇게 말하는데 안 믿어져.
‘내가 어찌게 빚이 없게 살까? 내가 어찌게 빚이 없을까’ 고지도 안 들려.
그래서 내가 조합에 찾아가서 물었지.
“우리 딸이 그란디, 여기 일전도 10원 한 장도 빚이 없다하던데 맞소?”
조합직원이 장부를 보고는 갚을 것이 아무것도 없디야.
그 말을 들으니 그때는, 영감 죽은 것도 생각이 안 나고 웃음이 나와, 빚이 없당게. 인자는 딸이 와서 10만 원을 줘도 다 내 것이네, 조합에 주지도 않고, 영감이 뺏어가도 않고.

인제는 마음이 아퍼, 우리 영감 통장에 돈이나 넣어서 어디 못나 보낸 것, 그것이 안됐어.
영감이 짜장을 좋아해서 진안읍내에 나가 짜장 사먹고 오는 걸 그리 좋아했는데.
밥만 먹고 일만 하고 밥만 먹고 일만하고, 죽자살자 땅만 파더니 무거운 병에 덜컥 걸려 가버렸어.

나도 이제 얼마 안 남았어.
20년 전에 풍이 왔는데 몸도 한 쪽이 어둔하고 말도 똑똑히 못햐.
예수병원이 내 집이야.
혈압이 올라 눈으로 터졌어, 눈이 죽은피로 덮여 한 이태를 세상을 못 봤어.
다들 “나이가 많아서 그랴” 그래.
내가 아프다고 울고불고 해서 대학병원에 데려가 보니, 눈이 죽은피로 새까매.
아들딸이 의사 말을 듣고 그런 줄도 몰랐다며 막 울어.
수술을 하는데 한쪽 눈을 칼로 긁어내는가 홀딱 벗겨내니 눈이 보여.
몇 년 후에 또 그래서 또 수술을 했어.
수술하고 나니 백내장이 왔어, 또 병원에 갔지.

아직도 눈이 잘 안 보여 아프고 그래서 내가 사람을 잘 못 알아봐.
혈압이 어떻게 잘못 와서 또 쓰러질지 모르니 매사가 조심시려.
그래도 밤낮 앉았으면 힘이 없다 해서 마을회관으로 유모차 끌고 왔다갔다 그렇게 살아.

지난 세월을 생각하면

‘참말로 나 같은 인생은 태어나지 말아야지.. 살지 말아야 한디 산다’. 하다가도,
가만 생각하면...
‘미국 가서 오도가도 못한 보고자픈 아들은 못 봐도, 이 만큼이라도 보고 걸어 다닐 만하면 괜찮지’ 생각해.

이젠 잘 죽는 것만 남았어, 고생 말고 남모르게 홀딱가는 거여.

할머니의 이야기가 끝나고, 잠시 정적의 순간-
영화 서편제의 한 장면이 스쳤다.
눈 먼 송화가 어느 주막에서 헤어진 동호를 만나 밤새 소리로 한을 풀어내는...

아침에 다시 할머니 집을 찾았다.
다시 둘러 본 마당은 어릴 적 외갓집 마당처럼 단정하였다.
거동도 불편하신데 깔끔하게 꾸며진 마당이 슬픈 것은
빨랫줄에 널린 이불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한 편에 심긴 작은 꽃과 나무 때문이었을까?

할머니는 잘 걷지 못하는 먼 길, 교회 갈 채비를 미리 하고 계셨다.
할머니께 앨범을 보여 달라 하였다.
할머니께서는 바로 며칠 전에 모든 사진을 다 태워버렸다 하셨다.
‘여태 두었던 이 사진들을 누가 쳐다나 볼까’ 하며 태워 버리셨단다.
그러며 남겨 놓은 아들 앨범을 가져 오셨다. 아들 앨범이 네 권이나 되었다.
자신의 모든 사진은 태우고 남긴 아들의 사진들...
‘보고자픈 아들-’
남은 소원이 무엇이냐고 여쭸을 때,
‘내게 무슨 소원이 있겠어’ 하며 손사래를 치며 숨겨 두었던 마지막 소원이 아닐까.

교회 가시는 할머니를 따라나오며,
방을 둘러보았다.
혼자 사시는 방, 여러 채의 이불과 베개..
화장대, 약봉지, 빨아 놓은 하얀 옷
그리고,
빨랫대 아래 모아 둔 예쁜 조약돌-

눈물이 핑 돌았다.
살아있는 한, 마음 한 편에는 이렇게 소녀가 사는데...